July 2004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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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30. Friday

대화


언제 뭘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증세... 돌아서면 한달. 한달전일인지, 두달전일인지 도무지 금방 생각이 안나네. 김빙이 서진한지도 좀 되긴 됐는데, 그게 4월이었는지, 5월이었는지, 아니면 6월초였나... 너거도 그러나? 가는 세월 좀 잡아도. 요즈음은 하루가 너무 아까워 새벽에 잠이 깨는 별날 일도 다 생기고 있다. 너거도 그러나? 돌아서면 12월이 올 것 같다. 너거도 그러나? 아무튼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번주에 휴가도 갔다 왔다. 결혼 9년만에 처가집에 맏사우 노릇 좀 했다. 분당 아회들아, 서쪽으로 한번 와줘라. 김빙하고 내가 한번 쏠께. 김빙아 그래도 되나? 참고로 나는 일산행 검토 중이다. 공기 좋은 곳으로 떠날려고. 다들 소식 궁금하다. 특히 일본 소식 궁금하다. 미국 소식은 안봐도 그림 그려진다


이런말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하기사 나도 잘 모르니까 남들이 어떻게 알겠누.. 다만 한가지만 분명히 이야기 하면, 별로 갈 곳이 없다. 니가 알다시피 난 친구도 별로 없다. 일주일에 사람과 대화하는 시간이 채 1시간을 넘지 못한지가 한 1년 이상 되어가고....이야기 할 곳도 없고....그래서 여기서 서성거리면서 설래바리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다고 뭐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직) 없다. 다행히도 ^^ 뭐 어떻게 해 돌라는 것은 없으나, 글 한줄로 설명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 잠시 잊어버리지 않았나 해서...(뭐 이거 삐짐모드 뭐 이런것 아니다.) 다만 2% 부족해서 여기 들어왔는데...한줄로 정리되면 좀 허탈해서..^^ 건강해라.


뭐 특별히 그림 그릴 거 있나. 세상을 통찰하기 위해 철학하는 모습이지. 나와는 웬지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 듯 해서. 내 반대를 생각하면 싶지 뭐. 아마도 니랑 나랑 세계의 유수한 인종을 접하면서 사귐을 하는 것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 만남의 시작이 나는 장사고 니는 학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 그리고 관리자가 되고 난 이후 보이기 시작하는 조직 사회의 냉정함. 중간에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부럽고... 아무튼 인생 60 이후에 한번 복기나 같이 해보자. 누구든지 welcome이다. 서울오면 보자. 항상 씩씩하게 니 모습을 지켜라.

2004.07.17. Saturday

광기

"뉴스에 굶주린 사람들, 새로운 것, 보다 새로운 것, 보다 기발하고 보다 신기한것, 보다 특이하고 보다 센세이셔널한 것에 굶주린 사람들. 새로운 것은 이미 접한 순간 낡아져버린다. 그리하여 또 다른 새롭고 특이하고 신기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性의 굶주림과 갈증은 倒錯을 낳지만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갈증은 미친 狂氣를 낳는다" (최인호...)

오래되고 편안한것 하나씩 가지고 있으면 좋다. 그것이 사람이던 물건이던 아니면 지 몸이던지 간에

2004.07.15. Thursday

지금의 내 나이

우리동네사람들 - 지금의 내 나이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 두 살
스물에다 둘을 더한 그런 나이죠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런 나이지만
때론 나도 모를 슬픔 밀려오지요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 다섯 살
스물에다 다섯을 더한 그런 나이죠
사랑도 진실도 모두 이뤄질 것 같지만
세상사는 일이 어디 그런 건가요

세월이 흘러서 하나 둘 씩 꿈도 멀어지고
내 맘 더욱 비어만 가는데
세월이 흘러도 사랑의 상처는 깊어지고
난 다시 길을 떠나가네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 아홉 살
스물에다 아홉을 더한 그런 나이죠
내 친구들은 사랑 먼 옛날의 얘기지만
아직 내 모습 사랑찾는 내 모습

지금의 내 나이는 서른 다섯살
서른에다 다섯을 더한 그런 나이죠
예전같으면은 예쁜 손자 볼 나이지만
잠못드는 이 밤 아직 쓰린 이 가슴

세월이 흐르면 모두 잊혀질 줄 알았지만
내게 아직 그리운 사람들
세월이 흐르면 내 모습도 함께 변하지만
난 다시 길을 걸어가네

http://www.iam1969.net/data/UridongnaeSarams_naenai.wma



2004.07.14. Wednesday

캠프소식?

http://www.peacedmz.net/main/event/dmzstory_plan01.jsp
DMZ Story 라는 것이 있군요. 청소년을 위한 평화, 생태, 역사 캠프라고 하는군요.

순간 백중위 또 군대이야기 할까 지레 손사래부터 치지 마세요.
뭐 어차피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니까 군대이야기는 맞을 수도 있겠군요.

1. 군대는 내 안의 파시즘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습니다. 날아다니는 나의 전투화 발을 몸으로 받았던 또래의 젊은 친구들 마구잡이 주먹질을 벌거벗은 온몸으로 당해내던 ..... 나의 짜증과 광란을 무거운 침묵으로 당해내던..... 내 마음에는 아직도 밑둥이 어디인지도 모를 파시즘이 버티고 있습니다. 언제쯤 털어버릴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죄 아니 저지르고 살고 싶은데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2. 군대도 없어지고 통일도 되어야 하나, 철조망은 그냥 두었으면 합니다. 그냥 가끔 철마다 나는 냉이나 두릅이나 더덕이나 캐고, 싸리비나 만들수 있도록 그냥 놓아 두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지금처럼 안보관광이나 하면서 그냥 내버려 두면 좋겠습니다. 하나의 바램입니다.

3. 캠프일정을 보다가 낯익은 곳이 많더군요, 대암산 용늪이란 곳은 고지에 있는 늪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지형은 드문곳이라고도 하고, 주위에 다양한 생물군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입니다. 금강초롱..이란 꽃도 이 주변에 참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안면은 신석기 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고, 과거 운석이 충돌해서 만들어진 지형이라, 펀치볼 (화채그릇)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해안의 해안은 亥安 으로 쓰는데요. 뱀이 많은 지형이라 돼지를 많이 키웠더니 마을이 아주 평안해졌다고 해서 해안입니다. 팔랑리에는 운치있는 성당 건물이 있고 월운리를 거쳐 두타연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 길이고, 열목어가 자라는 서식지이기 합니다. (팔랑리 성당 건물 사진과 두타연에 대한 설명은 글한줄숨고르며살기 제일 앞으로 가시면 찾으실 수 있습니다.) 백석산 전적비 구역은 밤이면 전쟁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바람사이에 스며드는 곳이고, 산이 병풍처럼 둘러처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인다는 고방산을 지나면 수입천을 낀 들판이 나타나면 그곳이 송현리...그리고 좀 지나가면 평화의 댐으로 이어지는.....

4. 언젠가는 다시 한번 갈겁니다. 살려 가면 제일 좋을것 같은데 쉽게 찾아올 행운은 아닌것 같습니다. 몇년후에 한번 갑시다 라고 사람들에게 어디선가에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왜? 도둑질 한놈은 꼭 현장에 다시 나타나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쩌면 한번 파시스트는 영원한 파시스트라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참으로 아니 변하는가 봅니다.....

2004.07.12. Monday

윤오영

<산호와 진주>속에 들어 있던 시와 수필을 따로 떼어 <금아시선 琴兒詩選> <금아문선 琴兒文選>으로 엮은 것은 1980년 3월의 일이다. 그 후 써온 시를 더해서 1993년에 시집 <생명>을, 그리고 올해에는 읽어버릴 뻔한 수필을 찾아내어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이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을 위하여 글을 써 왔다. 이 기쁨을 나누는 복이 계속되고 있음에 감사한다. - 1996년 5월, 피천득, 신판을 내며 - 피천득, 인연, 샘터, 1996.

머리도 무겁고, 몸도 저리더니만 결국 비가 주룩 주룩 내립니다.
욕조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피천득의 인연을 읽었습니다.
다시 만난 아사꼬는 반가웠고, 진주와 산호는 참 곱더군요.

치옹(痴翁) 윤오영에 관한 수필이 있어서, 잠시 치옹에 관한 리서치를^^ 했습니다.
교과서에서 보던 <방망이 깎던 노인>과 <마고자>를 쓰신 분이시더군요.
피천득 선생이 운오영의 수필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옮겨봅니다.


(그의 글은) 옥같이 고루 다듬어진 수필들이 참으로 많고 많다..금강석 같이 빛나는 대목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염소>라는 수필에, ".....그리고 주인이 저를 흥정하고 있는 동안은 주인 옆에 온순하게 충실하게 기다리고 서 있듯, 그리고 길가에 버려 있는 무청 시래기 옆에 세워 두면 다투어 푸른 잎을 뜯어먹듯, 그리고 다시 끌고 가면 먹던 것을 놓고 총총히 따라가듯." 또 문득 유원(悠遠)한 영겁을 느끼게 하는 <비원의 가을>의 절구(絶句),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 본 사람이다"

그래서 운오영의 책들을 몇권 주문했습니다.
곶감과 수필 -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방망이 깎던 노인 - 범우문고 104 윤오영 지음 / 범우사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 수필 60 피천득.김소운.윤오영 외 지음 / 혜문서관

아무래도 세번째 책을 볼때는 옆에 8절지 시험지 한장 펴 놓고 앞뒤로 빽빽이 적어서 검사 맡아야 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일요일은 이렇게 가고 있고, 밀려난 일들은 서서히 우울반 걱정반으로 다가 옵니다.

2004.07.11. Sunday

마담 [하마의 용사]

아침에 세탁기를 돌리고 손님을 맞이하여 커피를 한잔 마셨다. 그 손님과 함께 월남국수를 먹었다.3시간후, 다른 손님과 월남국수집에서 약속이 있다. 그 손님과 함께 또 포타이를 먹을 것이다.

마담 하마의 용사는 바로 홋카이도 개척자의 피를 이어 받은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였다. 클라크박사의 제자였던 그녀의 증조부가 모닝 코트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 안방 경대 옆에 걸려 있던 것을 본 기억이 나는데, 불거져 나온 이마며 굵직한 눈썹과 눈, 우뚝 솟은 코, 남자로서는 조금 고풍스럽고 실무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어 보이는 그 용모를 그녀는 쏙 빼닮았던 것이다. 또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흔히 볼 수 없는 곱슬머리였다. 마담 하마의 용사는, 그 머리카락은 아버지의 본부인이 아닌 하녀였던 자기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면서 그런 가족사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도 했다. 우리는 마담 하마의 용사를 여성으로, 다시 말해 성적인 존재인 여성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로 보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여하튼 성을 초월한 종류의 인물로 대했고, 그런 느낌은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 오에 겐자부로/양역관 옮김, 하마에게 물리다, 고려원, 1997

머리핀이나 하나 사야겠다. 머리가 너무 길다.



2004.07.09. Friday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 자이젠님 글

자이젠님의 글을 옮겨 적는다. 갈무리 해 놓은 예전 홈페이지에서 이곳 블로그로 이 글을 옮기는 지금 2007년 10월엔 자이젠은 없고 싸마리아만 있다. 물론 이 글이 생성된 날짜는 내가 갈무리한 날짜 2004년 7월 9일이 될 것이다. 그땐 자이젠만 있었고 싸마리아는 없었다.  오랜만에, 자이젠님 글을 아무 이유없이 좋아하던 한 사람의 팬으로 돌아가 본다.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자이젠

상실의 의미는 잃어버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만큼, 그 잃어버림의 기억이 끈질기게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상태의 의미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세계의 잔디밭에 일제히 그러나,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정한 행렬로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므로 해서 느껴지는 격렬한 서글픔과도 같은. 상실의 느낌은 상자 안에서부터 부풀어 상자 바깥 부분까지 먹먹해져오는 듯한 진공 상자의 진공 상태처럼, 열림과 닫힘의 극단의 지점을 오가면서 사람의 마음을 일그러지게 억누른다. 이러한 상실의 느낌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상실의 느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발버둥과 상실의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 세상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도망침으로. 상실의 느낌에 지쳐있는 당신,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 곳과 시간은, 세상 속의 지금인가, 세상 바깥의 지금인가.

지나치게 경쾌하기에 힘겨운 사랑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그러나 이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연애하는 사람들의 시대이다. 사람이 사람을 원한다는 것의 겁나는 의미를 숙연히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반짝 청춘의 유별난 해프닝쯤으로 위장한다. 세상의 모든 청춘들은 억울하다. 청춘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청춘은 불행을 불행으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청춘은 홀로 있음을 홀로있음의 상태로 가만 놔두지 않는다. 청춘은 죽음을 얘기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멸렬하게 숙인 고개와 가련하게 구부린 허리로 들여다보는 청춘이란 이름의 우물은, 그저 무섭다는 것, 그저 어렵다는 것, 그저 불확실하다는 것, 그저 모르겠다는 것 밖엔 아무것도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없다. 청춘은 체험이다. 그러나 청춘의 체험은, 체험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체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체험으로서는 누구라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지만, 오직 체험만으로서는 그 누구라도 어차피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시작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느덧 사랑이 떠나고, 사랑이 떠난 자리에 부지불식의 간격으로 상실의 느낌이 대체되면, 체험의 밑바닥은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처럼 메마르고 휑덩그레해진다. 체험을 삼켜 묻은 상실의 바닥은 아무리 긁어도 물 한방울 솟아나지 않고, 일일이 손바닥으로 긁어 만든 깊숙하게 텅 비어진 구멍은 점점 더 속력을 내어 커져만 간다. 굵은 강철봉과 탄력 좋은 고무공도 까슬까슬한 상실의 구멍의 가장자리를 메꾸지 못한다. 이윽고, 양보없는 세상마저 잔인하게 겁탈하듯 상실의 구멍을 관통한다. 무엇이 무엇을 관통한다는 것은 힘차고 거세게 밀고 들어와 신속하고 쿨하게 빠져나간다는 의미다. 사랑을 버림으로써 세상에 부드럽게 익숙해진 너. 또한 나. 그리고 우리. 또한 모두는, 상실의 구멍을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느새 흔적없이 무감각해져 버린 사랑에 대한 체험. 체험의 기억. 하루키는 말한다. 기억과 하나가 되느니 차라리 상실의 슬픔을 사랑하라고.

세상에 살아남은 자의 상실은 이렇게 허무한 것이다. 누군가의 상실은 나의 상실을 관통하고, 나의 상실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실을 관통한다. 상실은 어쩌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내 아버지의 구멍으로부터 쏟아져나와 내 어머니의 구멍을 관통했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하여 배설의 댓가이자 쾌락의 댓가이자 원망의 댓가가 아닌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할 쓸모가 없는 모든 것의 댓가가 아닌가.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다만 기쁜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어차피 갖가지 삶의 모양으로 함께 얽혀들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다만 다행인 것은, 어떤 관계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에, 서로를 영원히 모른체 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하여 상실의 아픔은 상실의 밑바닥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로만 바라볼 수는 없도록 만들어 준다.

청춘을 겪어 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못견디게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상실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아무나 상실을 이야기 한다. 상실의 아픔을 잊을 수 없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상실의 아픔을 잊어야만 한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상실은 단지 잃어버림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서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원하는 마음에 이토록 지독하게 비뚤어진 댓가를 요구하는가?


2004.07.08. Thursday

커피 한잔

가끔은 혼자 마시는 커피가 좋기는 하지.
아침에 나가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렇게 달랑 한줄만 쓰고 나갔습니다. 없는 살림에 요즘 스타벅스를 사서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는데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이제 스타벅스커피도 별 감동이 없어요. 아니면 이제서야 스타벅스커피가 그다지 맛이 없는 커피라는 것을 알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가 제일 좋은 시간인것 같아요. 그 시간전에는 피곤하기도 하고, 왠지 불안하고 그 시간후에는 푸코의 추처럼 왔다 갔다....

아래는 에코님이 올려주신 소설가 김영하의 글.

스타벅스적 삶 1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시애틀즈베스트니 하는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의 증식 속도가 무섭다. 이들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우선 손님을 줄 세운다(앉아서 느긋하게 메뉴판을 보던 즐거움은 어디로 갔는가). 직원들은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그들 머리 위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커피 이름이 적혀 있다.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뒤섞인 커피 이름들은 신참 고객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프라푸치노가 뭔지, 블렌디드가 뭔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다. 먹고 알아내는 수밖에는. 그리고 이들은 모두 마일리지 카드를 발행하고 있다. 열 잔을 마시면 한 잔을 거저 준다는데 그거 한 번 얻어먹으려면 매번 온 지갑을 다 뒤져야 한다. 겨우 주문에 성공한 손님들은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옆으로 이동해야 한다. 거기서 자기가 주문한 것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린다. 마침내 자기 커피가 나오면 감지덕지 받아 들고 빈자리를 찾아 앉는다. 커피 나왔다며 손님 부르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지고 커피 가는 소리는 또 왜 그리 요란한지. 그런데도 직원들은 모두가 씩씩하고 태연하다. 이 모든 장면에서 우리는 미국을 본다. 언제나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한 그 이상한 나라를.
스타벅스적 삶 2
미국식 커피 프랜차이즈들은 질문이 많다. 어느 미국 영화의 주인공은 스타벅스를 일컬어 “커피 한 잔 시킬 때마다 자기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는” 커피숍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말이다. 카페인이냐 디카페인이냐, 뜨거운 거냐 차가운 거냐, 작은 거냐, 큰 거냐, 아니면 왕창 큰 거냐. 여기서 마실 거냐, 가지고 갈 거냐. 머그컵이냐 종이컵이냐, 마일리지 카드는 없느냐, 혹시 케이크는 안 먹느냐, 묻고 또 묻는다. 손님들은 그때마다 대답을 해야 한다. 일단 그 자리에 선 이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스핑크스의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단골들은 자주 먹는 것을 정해놓는다. 그래야 직원의 날카로운 질문에 진땀을 흘리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 뭐 좀 새로운 거 하나 마셔볼까 생각하면 허둥대게 된다. 음, 어, 네, 아, 그래요, 음, 네, 얼마요? 아, 네. 이런 대화를 하고 옆으로 이동하여 기다리면 내가 주문했다는 커피를 받아 들게 되는데 도대체 왜 이 커피를 주문하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내가 마시려던 커피가 정말 이 ‘아이스 화이트 프라푸치노 톨 사이즈’였단 말인가? 혼란스럽지만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게 미국식 삶의 요체다. 다 마신 후에 빈잔을 반납하는 것도 손님의 신성한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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