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 자이젠님 글
자이젠님의 글을 옮겨 적는다. 갈무리 해 놓은 예전 홈페이지에서 이곳 블로그로 이 글을 옮기는 지금 2007년 10월엔 자이젠은 없고 싸마리아만 있다. 물론 이 글이 생성된 날짜는 내가 갈무리한 날짜 2004년 7월 9일이 될 것이다. 그땐 자이젠만 있었고 싸마리아는 없었다. 오랜만에, 자이젠님 글을 아무 이유없이 좋아하던 한 사람의 팬으로 돌아가 본다.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자이젠
상실의 의미는 잃어버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만큼, 그 잃어버림의 기억이 끈질기게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상태의 의미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세계의 잔디밭에 일제히 그러나,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정한 행렬로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므로 해서 느껴지는 격렬한 서글픔과도 같은. 상실의 느낌은 상자 안에서부터 부풀어 상자 바깥 부분까지 먹먹해져오는 듯한 진공 상자의 진공 상태처럼, 열림과 닫힘의 극단의 지점을 오가면서 사람의 마음을 일그러지게 억누른다. 이러한 상실의 느낌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상실의 느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발버둥과 상실의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 세상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도망침으로. 상실의 느낌에 지쳐있는 당신,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 곳과 시간은, 세상 속의 지금인가, 세상 바깥의 지금인가.
지나치게 경쾌하기에 힘겨운 사랑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그러나 이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연애하는 사람들의 시대이다. 사람이 사람을 원한다는 것의 겁나는 의미를 숙연히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사랑을 반짝 청춘의 유별난 해프닝쯤으로 위장한다. 세상의 모든 청춘들은 억울하다. 청춘은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청춘은 불행을 불행으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청춘은 홀로 있음을 홀로있음의 상태로 가만 놔두지 않는다. 청춘은 죽음을 얘기하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멸렬하게 숙인 고개와 가련하게 구부린 허리로 들여다보는 청춘이란 이름의 우물은, 그저 무섭다는 것, 그저 어렵다는 것, 그저 불확실하다는 것, 그저 모르겠다는 것 밖엔 아무것도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 없다. 청춘은 체험이다. 그러나 청춘의 체험은, 체험으로 알게 된 모든 것을 체험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체험으로서는 누구라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지만, 오직 체험만으로서는 그 누구라도 어차피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 사랑이 시작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느덧 사랑이 떠나고, 사랑이 떠난 자리에 부지불식의 간격으로 상실의 느낌이 대체되면, 체험의 밑바닥은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처럼 메마르고 휑덩그레해진다. 체험을 삼켜 묻은 상실의 바닥은 아무리 긁어도 물 한방울 솟아나지 않고, 일일이 손바닥으로 긁어 만든 깊숙하게 텅 비어진 구멍은 점점 더 속력을 내어 커져만 간다. 굵은 강철봉과 탄력 좋은 고무공도 까슬까슬한 상실의 구멍의 가장자리를 메꾸지 못한다. 이윽고, 양보없는 세상마저 잔인하게 겁탈하듯 상실의 구멍을 관통한다. 무엇이 무엇을 관통한다는 것은 힘차고 거세게 밀고 들어와 신속하고 쿨하게 빠져나간다는 의미다. 사랑을 버림으로써 세상에 부드럽게 익숙해진 너. 또한 나. 그리고 우리. 또한 모두는, 상실의 구멍을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느새 흔적없이 무감각해져 버린 사랑에 대한 체험. 체험의 기억. 하루키는 말한다. 기억과 하나가 되느니 차라리 상실의 슬픔을 사랑하라고.
세상에 살아남은 자의 상실은 이렇게 허무한 것이다. 누군가의 상실은 나의 상실을 관통하고, 나의 상실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실을 관통한다. 상실은 어쩌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할 댓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내 아버지의 구멍으로부터 쏟아져나와 내 어머니의 구멍을 관통했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하여 배설의 댓가이자 쾌락의 댓가이자 원망의 댓가가 아닌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할 쓸모가 없는 모든 것의 댓가가 아닌가.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다만 기쁜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어차피 갖가지 삶의 모양으로 함께 얽혀들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다만 다행인 것은, 어떤 관계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기에, 서로를 영원히 모른체 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하여 상실의 아픔은 상실의 밑바닥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것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로만 바라볼 수는 없도록 만들어 준다.
청춘을 겪어 넘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못견디게 힘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상실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아무나 상실을 이야기 한다. 상실의 아픔을 잊을 수 없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상실의 아픔을 잊어야만 한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상실은 단지 잃어버림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해서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원하는 마음에 이토록 지독하게 비뚤어진 댓가를 요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