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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9. Sunday

인간이 버림받은 시대

복음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Brothers and sisters: Jews demand signs and Greeks look for wisdom, but we proclaim Christ crucified, a stumbling block to Jews and foolishness to Gentiles, but to those who are called, Jews and Greeks alike,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human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human strength.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1서, 1:22-25)
리치 신부님이 다음과 같이 강론을 통해 설명해 주셨다.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유대인(Jews)과 그렇지 않은 이방인(Gentile)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사도 바오로(Paul)는 코린토1서에서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눈으로 보이는 표징/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유대인(Jews) 둘째, 논리적으로 해명이 가능한 지혜 (Sophia)를 요구하는 그리스인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못 박혀 죽음을 선포하는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이다. 성경에 써진 문자에 구애받는 유대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천벌의 저주를 받은 것이고, 논리와 철학을 찾는 그리스인에게는 바보 같은 행동으로 보인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 사람 참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사람도 좋지만, 바보 같이 예수를 믿는다 말이야 !  아울러, 오늘의 제1독서인 탈출기(Exodus, 20:1-17)에 설명된 계명은 문자 그대로의 계명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비록 헤아릴 수 없는 죄를 짓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의 뜻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셨다.

예전에 받아 적어 놓았던 함석헌 선생님의 글이 생각나서 다시 찾아보았다. 같이 놓아두고 보면 좋을 듯 해서.
 마치 반석에 이르지 않고는 산 샘을 못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이 있다 해서 웃고 없다 해서 우는 사람, 한가한 사람 입니다. 정말 살자는 마음이면 현실을 보고 절망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려 애써 보다가 팽개치고 종살이라도 하며 살아가 보자 하는 놈 산 놈이 아닙니다. 반항하다가 죽더라도 종살이는 못하겠다 하는 놈이 정말 산 놈이요, 산 놈이기 때문에 죽어도 삽니다. 산 생명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희망은 그런 사람들과만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 자체 안에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다시 말하면 불멸의 생명을 믿어서만, 믿음 그 자체가 희망이요 생명이란 말입니다. 분재 재배자가 나무를 제 맘대로 심지만 분재의 주인은 그 분재자가 아니고 그 나무 자신입니다. 장에 새를 기르는 사람이 맘대로 기르고 노래를 가르치지만 새장의 주인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이 나무에 있고 새에 있지, 그 기르는 놈에 있지 않습니다. 나라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지배자가 제 마음대로 씨알을 이리 끌고 저리 끌지만, 그 노릇을 하는 권리는 씨알에 있지 지배자에 있지 않습니다. 씨알이 지배자에 복종하니 그러지, 만일 죽기로 한하고 반항한다면 지배자 자신은 쌀을 한 톨 생산할 수도 실을 한 치 만들 수도 없습니다. 종살이 아니하는 권리는 씨알에게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현실을 바로 파악하나 못하나에 있습니다. 똑바로만 본다면, 나무는 분이 죽는 것임을 알 것이고, 새는 장이 죽는 곳임을 알 것이고, 씨알은 그 제도가 자기의 죽는 곳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몸을 위한 것이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몸을 생명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그 몸에 쓰고 정신에 쓰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어느 역사도 죽음으로써 참생명의 길을 드러내며 증거해 준 사람없이 바로 된 역사는 없습니다. 옥 속에 절대의 힘을 품으면서도 참을 바로 보지 못하는 씨알 앞에 자기를 죽여 생명의 아구를 트이어 보여줄 때 씨알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본래 희망(希望)의 희(希)는 지금 쓰는 희(稀)와 마찬가지로 드물다는, 잘 뵈지 않는다는 뜻이고, 망(望)은 월(月), 곧 달을 그려서 높이 있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첫머리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것의 확증*" 이라는 말이 이 뜻을 잘 말해 줍니다.  -끝나지 않은 강연: 함석헌 미간행 강연 유고집, 172쪽

* Faith is the realization of what is hoped for and evidence of things not seen
끝나지 않은 강연
함석헌기념사업회 엮음/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