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 프랭클린까지 걸어갔다가 해지기 전에 들어왔다. 걷는 동안 집에 가면 히브리서를 한번 읽어야지 하고 들어와서 보지는 않지만 항상 곁에 놓여있었던 공동번역 성서에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그러고 나서 자연스럽게 구약 '욥기'도 한번 읽었다. 왜 새삼스럽게 욥기와 히브리서를 읽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읽는다고 제대로 알 수도 없겠다. 그래도 요악해보면, '욥기'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不可知論을, 히브리서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주는 것은 믿음이다 는 것이 아닐까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볼 수 없는 것의 확증 Faith is the realization of what is hoped for and evidence of things not seen" 이라는 히브리서 11장의 구절은 예전에 함석헌 선생님의 글에서 보고 옮겨 적어 놓기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오늘 평소와는 다른 저녁시간을 보냈지 않았을까 한다.
담배 하나 먹고 책 한권을 무심코 뽑았는데 중간에 종이 한 장이 들어있어서 읽어보니 참으로 오래된 메모지 한 장이다. 작은 어머니가 적어 주신 것 같은데 기억해 보니 작은 아버지 첫 번째 기일을 즈음해서 작은 음악회를 개최할 때 쓸 약력을 적어 주신 듯하다. 아래한글로 만들어서 보내 드리기만 하고 작은 아버지 기일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한다고 작은 어머니께 말씀 드린 듯하다.
하지만 사실 그즈음엔 미쳐서 산에 들에 놀러 다닌다고 가지 못했다. 지금 와서 그때 꼭 갔었어야만 했는데 하고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그때 안 미치고 산에 들에 안 놀러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해본다. 그 메모지는 가끔 집 정리 할 때 마다 예상치 않게 발견되고는 했는데 여기저기에 넣어두다가 오늘 또 다시 만났다.
결국 그 메모지는 내가 작은 아버지와 같이 지냈던 시간 보다 훨씬 더 오래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 되지만, 달랑 메모지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이 가당치 않다 싶으면서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니 좀 씁쓸하다. 오 주여. 오늘은 왜 !
고 백의현 박사 (1950-1996) : 1950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 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전북대학교 전임강사 역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알렉산더 쩨믈린스키의 가곡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성악연주 및 문헌박사학위 취득. 1990년 귀국하여 성음회, 현대가곡연구회 등을 통하여 연주 및 세미나 개최, 저술 등의 분야에서 활약 하였고 , 1993년도부터 순복음 중앙교회 나사렛 성가대 지휘자로 봉직하여 헌신하였고 경원대학교. 명지대학교. 성결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음. 1995년 9월부터 세종대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정기연주회를 총괄 지휘하는 등 정력적으로 학교 업무 및 후학지도에 힘쓰던 중 간암 발병으로 인하여 투병하다가 1996년 3월 30일 대구 동산 병원에서 46회 생일을 하루 넘기고 소천 하였음.
사진 뒷면에 1986년 가을 이라고 쓰여진 글씨는 할아버지 필체.
물새. 鳥歌 혹은 弔歌 먼 먼 하늘가에 외면할 수 없는 저 물새 어쩌면 물결같이 출렁이고 어쩌면 구름같이 떠다니고 노을빛 휘어져내린 끝머리에 비끼어 나는 한점 생명이여
먼 먼 바다끝에 외면할 수 없는 저 물새 어쩌면 잔별같이 반짝이고 어쩌면 꽃잎같이 떠다니고 어느날 부터일까 그 움직임이 수줍어 나는 한점 생명이여
인디애나 대학 도서관 웹사이트에서 찾은 박사학위논문 서지 (검색일: 12.21.2008)
Selected songs of Alexander Zemlinsky : a study for performers / by Eui H. Paik
기밀과 창작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례가 있습니다. ‘얀’이란 세계적 사진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본 지구’란 사진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하늘에서 찍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전협정 상으로도 어려운 일이지만 군사기밀 보호법 때문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사군정위 비서장인 ‘캐빈 매튼’ 대령은 그를 헬기에 태워 한국의 사진가들에겐 한번도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에 대한 고공촬영을 했고 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아마 그는 한국의 DMZ를 대표하는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무장지대를 대상으로 10년 넘게 사진작업을 해온 저의 사진은 군사기밀보호법의 혐의가 씌워진 채 어쩌면 ‘모내기’그림으로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당하셨던 ‘신학철화백’의 그림처럼 철창에 갇혀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될 운명에 있습니다. FTA를 반대하는 예술가들에게 대통령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소수 공안세력들은 창작의 자유 대신 기밀의 족쇄를 채워 손발을 묶고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습니다.
낯선 것을 온가슴으로 포옹하여 한시대의 ‘결’을 만들어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본성은 마치 잠수함에 독가스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넣어지는 토끼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낯선 것이 위기와 도전과 고난일 때도 있기에 시대의 위험을 감지하고 끌어안는 예술가의 혼으로 인해 한 시대는 위기를 예감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의 사건이 이시대의 위기를 예고하는 사건이 아니길 바랍니다.
‘사람몸 중에 중심이 어디일까요?’ 라는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심장’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아픈 곳’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는 때문입니다.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입니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제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가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결‘, 평화와 통일의 ’결‘을 만들어 가야하는 시대의 요구에 더 이상 국가보안법이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들께 번거로운 수고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며, 정성과 사랑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삶의 길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중략......그러나 해는 서쪽으로 넘어가고 성숙한 인간에게는 등뒤에 그림자가 생겨나서 점점 길어진다. 이제부터 그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추억들의 무게를 발뒤축에 끌고 다닌다. 그가 사랑했다가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신의 그림자에 보태지는 것이다. 과연 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과거의 덩치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뒤에 달린 그림자가 너무 무거워져서 걸음을 멈추어야 되는 날이 온다. 그러면 그는 사라져버린다. 그는 송두리째 그림자로 변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맡겨진다.
어제밤엔 침대에 누워서 불꽃놀이를 그냥 봤다. 오후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하나 들고 카보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소나기 피하느라 잠시 머물렀던 시간을 합하니 한 두어 시간 걸린 것 같다. 해질녘에 비는 다시 한 번 내리고 덕분에 Astrud의 목소리는 제법 양호하다.
우리집 현관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데 벽 밑에 삼불암이라는 호를 자필자가한 울릉도 향나무 판이 놓여 있다. 울릉도의 높은 절벽에 자생하는 향나무는 이제는 귀해져서 이것을 선물로 받은 10년 전만 해도 주문을 하고 한참 기다려야 했다. 울릉도는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얽혀 있는 곳이다.
내가 울릉도에 처음 간 것은 꼭 30년 전, 1947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나이 25세, 국립박물관에 갓 들어간 젊은 직원으로서 한국 산악회의 조사단을 따라 나섰던 것이다. 울릉도에서는 신라시대의 적석총이 많아서 젊은 고고학단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지만, 맑고 푸른 바다와 오징어 말리는 독특한 향기를 잊을 수 없었다.
두번째 간 것은 6.25 동란도 한고비 넘은 1952년이었고 이때도 역시 산악회의 조사단에 끼어서 건너간 것이다. 나는 울릉도와의 재회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산수는 여전히 맑았고 밤이 되면 먼 바다의 오징어배 등불이 떨어진 별들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성인봉을 내려오다 나리동 계곡에 떨어진다. 모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나 혼자 계곡에 가로질러진 썩은 다리를 건너다 다리와 함께 떨어져 아차 하는 순간에 바위에 이마가 깨어지는 중상을 입은 것이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나는 급히 만들어진 들것에 실려 천부동으로 운반되고 거시서 배를 타고 도동으로 돌아왔다. 여기 조그만 병원에서 이마를 꿰멘 나는 하룻밤을 묵고 여관으로 옮겼다. 차분하게 생긴 간호원은 어느새 나의 피 묻은 옷을 빨고 다려서 떠나는 나에게 안겨 주었다. 멀리 집을 떠나서 홀로 누워 있는 나에게 그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부산에 돌아와서 나는 일그러진 이마를 다시 수술하고 울릉도의 일들을 조그만 글씨로 써서 어느 신문에 실었다. 그리고 그것을 오려서 조그만 감사의 말과 함께 이름도 모르는 그 간호원에게 보냈다. 회답이 오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그 뒤 또 편지를 보낼 용기도 이유도 나에게는 없었고, 나는 곳 몇해 동안의 미국 유학을 떠났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없는 사이에 그녀가 박물관으로 부친 오징어 꾸러미가 '받을 사람 없음'으로 되돌아가 나는 그녀에게 행방불명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세번째로 울릉도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3년 9월이었다. 국립박물관에서 간행할 울릉도 조사보고서의 원 고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또 한번 찾아간 것이다. 세번째 보는 도동의 모습은 10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찾아간 나는 이제 이마가 넓어지기 시작한 41세의 장년이 되어 있었다. 나는 현포로 가기에 앞서 추억 새로운 도동의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간호원도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병원을 떠나 약국을 차리고 있었고, 10년 만에 보는 그녀도 이제 아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 나를 몰라 보았다. 그리고는 기억이 되살아난 휘둥그래진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아직도 독신인 모양이었다. 현포에서 도동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마침 포항으로 떠나는 배편이 있어서 다음 배로 가라고 말리는 그녀와 부두에서 작별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4년, 몇 장의 편지가 오고간 1967년에 그녀는 서울로 나를 찾았다. 곧 결혼을 하게 되어 있단다.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별다른 의미에서 서로 의지할 이성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가. 인생은 갈수록 고독해 지는 법이다. 그 뒤 10년, 우리는 다시 소식을 바꾸지 못했다. 서로 만나고 싶어도 인생도 오십을 넘으면 육신의 늙음이 용기를 가리우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준 향나무판을 언제나 향기가 새롭다. 물건이란 허무한 것 같지만, 사람보다 오래 남는 인생의 기념물이 될 때가 있다. 인생은 긴 것 같으면서 사람 하나 제대로 만나도 얘기할 기회도 없는가 보다. 한단(邯鄲)의 꿈 속에서 추억과 허무가 뒤섞인 향나무판이 오늘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