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4
등 덩굴 트레리스 밑에 있는 세사밭, 손을 세사 속에 넣으면 물기가 있어 차가웠다. 왼손이 들어 있는 세사 위를 바른손 바닥으로 두들기다가 왼손을 가만히 빼내면 두꺼비집이 모래 속에 작은 토굴같이 파진다. 손에 묻은 모래가 내 눈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제 입을 내 눈에 갖다 대고 불어 주느라고 애를 썼다. 한참 그러다가 제 손가락에 묻었던 모래가 내 눈으로 더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영이도 울었다. 둘이서 울었다. 어느날 나는 영이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 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우정은 이렇게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욱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 不信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늙은 어머니가 계서서 그렇겠지' 포숙 鮑叔이 관중 管仲을 이해하였듯이 친구를 믿어야 한다.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안는 사람보다는 믿다가 속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여성과의 우정은 윤기 있는 위안을 준다. 영민한 여성과의 우정은 다채로운 기쁨을 주고, 순박한 여성과의 우정은 영혼을 승화시켜 준다. 이성간의 우정은 사상의 변모이거나 결국 사랑으로 끝난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연정과는 달리 우정은 담박하여 독점욕이 숨어 있지 않다. 남녀간의 우정은 결혼 후에는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남편의, 그 아내의 교양 있는 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널리 많이 사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친구에게 마음을 다 바치는 예도 있다. 백수십 편이나 되는 세익스피어의 소네트, 밀턴의 장시 長詩 <리시다스>, 테니슨이 수년을 걸쳐서 쓴 130편이 넘는 <메모리암>은 모두 단 한 친구를 위한 우정의 표현이었다.
내 처지 부끄러워 헛된 한숨 지어 보고
남의 복 시기하여 혼자 슬퍼하다가도
너를 문득 생각하면 노고지리 되는고야
첫새벽 하늘을 솟는 새, 임금인들 부러우리
-세익스피어 <소네트 29번>
마음 놓이는 친구가 없는 것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 늙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수십 년 간 사귀어 온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 둘 세상을 떠나 그 수가 줄어 간다. 친구는 나의 일부분이다. 나 자신이 줄어 가고 있다. 나 죽을때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던 친구가 먼저 가버리기도 하였다. 다행히 지금도 나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는 친구 몇분이 있다. 만나서 즐기는 것은 청담 淸談뿐은 아니다. 늙은 이야기, 자식 이야기, 그런 것들이다. 때로는 학문의 고답한 경지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덧 섹스가 화제가 되어 소리내어 웃기도 한다.(우정 - 피천득, 인연, 252 - 254)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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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니 옛날 생각이 나시나봐요 ^^ 아님 최근에 아프셨다더니...그래서 그런가..밥 많이 드시고 가을을 이겨내셔요 ! 덕분에 옛날 사진 보니 재밌긴 하네요..
으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