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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9. Friday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당신 할아버지의 처남이라.

우연한 기회에 이달희 문고
http://myhome.hanafos.com/~dlee/index.html에 들어가서 주인 어르신에게 메일을 보냈다. 여든이 넘으신 어른이 홈페이지도 직접 꾸미고 계신다니 기회가 닿으면 한번 찾아뵙고 인사 드리고 싶다. 이메일 답 해주신 내용이다.

멀리 미국 노스 케롤라이나에서 이달희문고를 찾아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우연이라고도 기우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白甲鏞博士의 조부님은 바로 나의 小南一雨 할아버지의 처남 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나는 小南一雨 할아버지의 둘째아들(香園 相武)의 둘째아들입니다. 한달에 12일간씩 출장근무를 하고있는 일본 북해도의 병원에서 지금 막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장을 풀기도 전에 백종규씨의 Mail을 보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이것을 인연으로 자주 Mail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 80을 넘었지만 한국에 돌아오면 늦게 시작한 컨퓨터를 아직 가갸거겨도 모르면서 장난감 삼아 들여다보고 있답니다. 끝으로 일정기간 집을 비워야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회신이 늦은 것 양해주시기 바랍니다.

2001년 경에 한 어르신과 주고 받은 이메일 내용이다. 나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당신의 할아버지의 처남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어르신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는 언제부터인가 접속이 되지 않아서 지금도 무탈하신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불초소생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책에서 본 당신의 할아버지에 대해서 조금 옮겨 적는다.

소남 이일우 고택, 대구시 중구 서성로 1가 44번지

이상화 시인의 부친 이시우의 친형이었던 소남 이일우선생의 고택이다. 집은 둘로 나눠져 소남의 두 손자가 나눠 살았다. 들어가는 입구 서성1가 46번지에는 차남 탁희, 서성1가 44-3번지에는 장남 석희씨가 살았다. 44번지에는 탁희씨의 안사람이자 상화시인의 질녀인 분이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상화의 부친은 상화가 8살이었던 1907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백부의 집에 얹혀 살았다고 한다. 이일우의 재산은 부친 금남 이동진의 자수성가로 시작했으며 구한말 곳간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엽전을 상속했다고 한다. 3천여 섬을 수확하는 20여만 평의 토지에 소유한 집이 100여채가 넘었다고 한다. 당시 천석꾼은 되어야 부자소리를 들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이일우의 3천여석은 100억원을 가진 요즘 부자들의 3명 재산을 합쳤다고 보면 될것이다. 소남은 다른 지주들의 절반만 받아 덕을 쌓았다고 한다.

금남의 뜻으로 민족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사재로 풀어 * '우현서루'를 열고 소남에게 운영을 맡겼다고 한다. 우현서루를 운영하며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 귀족들의 선만의 대상이었던 총독부의 자문기구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소남은 상정의 만주 독립운동과 상화의 3.1운동 거사로 잠시 유치장 신세도 지기도 했었지만 덕망이 있어 일제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목우 백기만은 대구 항일정신의 양 거두로 소남과 청도 최현달을 꼽기도 했다. 청도 선생은 청도군수로 있다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군수직을 내던지고 죽을 각오로 단식을 했으며 청구대학 설립자 최해청 선생의 부친이다. (대구 신택리지, 북랜드, 216)

* 우현서루(友弦書樓): 교남학교 대륜학교의 전신: 소남의 부친 금남 이동진 선생이 을사늑약 이후 사재로 창설한 곳으로 그의 장자인 소남 이일우 선생이 운영하였다. 현재의 대구은행 서성로 지점 자리며 옛터는 현 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되는 지점의 서북 일각을 차지한 7백 여평의 대지였다. 우현(友弦)이란 '역사적인 현자들과 벗 삼는다'는 뜻으로 근대초기 민족지사를 양성한 산실이었다. 영남일대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청운의 뜻을 품은 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우현서루를 거친 사람만 150여명이 넘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박은식, 이동휘, 조성환, 금지섭 등 민족지사들이 이 곳을 거쳐갔다. 후일 교남학원의 모체가 되었으며 1911년 강제로 폐쇄되었다.

이일우는 이에 낙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시 강의원(講義院)을 세우는 한편, 애국부인회를 조직하며 신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한.일 야구시합 끝에 터진 패싸움에 연루된 것이 들통이 나면서 폐쇄당했다. 이후 講義院의 내적 운영자였고 대구 달성유치원 원장이던 홍일주 선생을 중심으로 3.1운동으로 함께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영서, 정운기와 의기투합하여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정운기가 초대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고 1924년 5월 교명을 교남학교로 변경하고 교사를 대구시 남산동 657번지로 이전하였다. 후에 민족사학 대륜학교의 전신인 서병조의 지원으로 '대붕재단'을 거쳐 대륜재단이 되었다. 1920년대에 소남은 사설 남명학교를 세웠다. 훗날 광산업을 하던 김태원씨가 건물을 희사하면서 서구 비산동으로 옮겨가서 대성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우현서루에서 보관했던 책의 일부분인 '사부총관'등 3천 937권은 후손의 기증으로 경북대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국 서적들은 일제가 강탈해 갔거나 유실 되었으며 그중 일부가 이천동의 고서점에 있었다고 한다. 서점주가 사망한 뒤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대구 신택리지, 북랜드,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