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 얘기 아시죠? 백설공주 얘기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메타포예요. 마녀는, 아니 그녀는 마녀가 아닐는지도 몰라요. 정말 예쁜 여자였을 수도 있죠. 그 여자의 겨울은 말을 하죠. 그건 거울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아마 남자 였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았을 거예요. 자아도취의 반영물이 꼭 매력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여하튼 그 여자는 마법의 성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살았죠.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런데 어느 날 백설공주가 나타난 거죠. 그녀가 하얗다는 걸 주목하세요. 갑자기 성현이가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일곱 난쟁이가 등장하죠. 난쟁이는 정말로 키가 작은 인간을 말하는게 아니고 평민 또는 도둑을 상징한다고 어느 서양 사람이 그러더군요. 중세의 종교화를 생각해봐요. 교황은 집채만하고 왕은 그 기둥만하고 제후는 그냥 사람만하죠. 그러나 평민이야 난쟁이가 될 수밖에......여하튼 백설공주가 나타나자 마녀의 거울은 변했어요. 이제 백설공주가 더 예쁘다고 말하는 거죠. 역시 그 거울은 남자였을 가능성이 크죠? 나르시시즘의 충실한 반영물이 사라졌을 때, 인간들은 가장 흥분하죠. 회사가 도산했을 때, 사장들은 왜 자살하는 줄 아세요? 그 회사는 그의 자아의 확장물이기 때문이에요. 그 회사가 곧 자신의 이름이고 얼굴이고 가장 아름다운 마스크인데 그게 깨진 거죠. 그럴 때 사람들은 가장 큰 아픔을 맛보죠. 우리의 마녀도 예외는 아니었죠.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 빨간 사과, 다시 색에 주의하세요. 그 사과를 먹게 만들죠. 하야안 공주가 빠알간 사과를 먹고 쓰러 지죠. 마녀가 공주를 죽이는 방법이 먹,이,는, 방식이라는 것도 중요해요.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지 않나요? 광고에서 자주 쓰이는 빨간 사과, 이 섹슈얼한 상징물을 공주가 먹도록 만든다 - 하얀 공주에게 빨간 성을 집어넣어 파멸시킨다 - 재밌는 상징 아녜요? 그 마녀가 가지고 있지 못한 유일한 것 - 백설이 상징하는 순결성 아니겠어요? 그걸 파멸시킨 거죠.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모든 나르시시즘은 파멸의 길로 간다는 거죠. (김영하, 거울에 대한 명상, 호출, p316-317쪽)
'전위적'이라는 단어가 당신에겐 어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경험이나 교육이 아닌, 선천적으로 예술적 오감을 타고 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선천적인 예술 에너지는 당신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소비자로 만들어 줍니다.
자신감과 솔직함은 당신 취향에 중요한 기준입니다. 대중을 의식하면서 쓴 시,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그린 그림, 카메라 의식하며 하는 연기, 겉멋든 음악... 이런 것들은 경멸의 대상입니다. 서툴고 즉흥적이라도 자신만의 진실함이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이런 취향은 전세계 모든 평론가들이 공유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비록 '평론'을 쓰기엔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최소한 당신은, 전문 평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우수한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고흐는 평생 참으로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모델을 살 돈이 없던 그는 평생 거울 속의 자신을 모델로 삼았죠.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았던,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이 바라보던 자화상. 당신의 취향은 이 자화상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것 당신은 어쩌면 괴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당신 취향은 지금까지 주류에 속한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속적인 대중을 떠나 고답적인 예술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당신은 영락없는 메인스트림입니다. 당신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것들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일탈적인 것들이 진실되길 바랍니다. 다음 시에는 바로 그런 진실이 있습니다.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괘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저주하는 것 당신은 (아마도) 훈계하거나 훈계받는걸 제일 싫어할 겁니다. 규율, 법, 질서, 사회 정화, 국민 정서 어쩌고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취향을 제한하고 옭아 매려는 검열주의자, 엄숙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작품과 인생을 함부로 가치 판단하고 평가하고 거기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으려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낄 겁니다.
당신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한 독자가 내게 말했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들으면서는 자살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물었다. 왜죠? 그 다음 곡이 <Take This Waltz>이기 때문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 그래서요? 왈츠를 들으면서는 팔목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왈츠는 3박자니까요. 김영하, 포스트잇 p200쪽
아마 여기에도 4분:25초 만큼의 오류가 있을것이다. 실제 그 사이에는 <I'm Your Man>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점에서 소설은 무죄다.
......바이올린 때문에 뜻밖에 한 여성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연애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살았기에 주변 여성들을 많이 알긴 했어도 특별한 일이 생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젊은 날의 풍경 정도였다.
대학의 여름 방학, 귀향하는 경부선 열차 안에 같은 방향으로 가는 학생들 한 패거리가 타고 있었다. 아예 한 칸을 타지하고 있던 동무들이 갑갑하니 내게 바이올린을 연주해보라고 했다. 아마 <유모레스크>나 무슨 명곡 같은 걸 켰을 것이다. 그때 내 바이올린에 맞춰 한 여성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병창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쉽게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스물한둘이던 김은희라는 여성은 마산에 있는 학교의 음악선생인데 집이 평양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특별한 호의를 받게 될까 염려되어 나는 결혼한 사람으로 아내가 기다린다는 말을 했다. 얼마 후 우리집으로 간단한 안부를 묻는 엽서가 한 장 날아왔다.
아버지는 그 편지를 전해주며 "여자들한테 너무 친절하게 하지 말라"고 경계했다. 그 후에도 몇 번 편지가 왔는데 얇은 비단 손수건이나 말린 꽃이 들어 있기도 하고 악보를 구해달란 부탁이 오기도 했다. 나는 엽서에 간단히 답하고 부탁한 악보도 보냈다. 특별한 정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결혼한다는 소식이 오고 편지도 더 오가지 않게 되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니 보성전문 학생들을 데리고 만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기차가 평양을 지나쳐갔다. 그때는 별의별 일이 다 신문에 나던 때라 평양의 김은희가 이 기사를 보았던 모양이다. 기차가 어느 역에 정차하자 김은희가 학생수 대로 먹을 거리를 한 보따리 해서 들리우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학생들은 뜻하지 선물에 좋아서 난리였다. 그녀는 그저 선의의 여성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날에는 역에 나올 것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집은 평양역 부근의 2층 양옥인데 창문에서 기차를 향해 손만 흔들어 작별하기로 했다. 나도 그집에 잠시 눈을 주었다.
몇 년 후 다시 서울대학병원에서 김은희의 가족들로부터 내게 연락이 왔다. 그녀가 무슨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내가 꼭 한 번 면회를 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와 남편을 비롯한 가족이 모여 있는 병실에 갔다. 그때 수술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거의 각오하는 것이어서 마지막 인사를 미리 해두는 자리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말했는지 가족들은 나를 깍듯이 대했다. 수술은 잘 끝났다. 그 부친은 그때 내게 미국 유학을 권했다. 모든 비용을 자기네가 대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의 집안이나 가족 상황 들에 대해 한마디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김은희는 내 은시계에 넣으라고 자기 사진을 하나 보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나는 날 서울역에서 그녀의 지기이던 평양 출신의 이용설 박사와 내가 배웅을 나갔다.
그리고 6.25가 났다. 종래 소식이 끊어졌다. 아마 대단한 평양 부호였으려니 싶은데 공산당 손에 견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그녀가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나는 적극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 뒷소문도 듣지 못했다. 몇 해 전 그녀의 제자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그 제자의 청에 따라 스승의 기념품으로 전했다....... (최태영 회고록, 인간단군을 찾아서, 학고재, 156-158쪽 부분)